포위망 탈출작전이 운명의 갈림길이 되고..... 장사진을 친 대병력의 패잔병이 움직이는 주변 농가는 가는 곳마다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농가에 들어가 말린 옥수수를 훑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거르면서 씹는 게 유일한 식사였다. 고구마 밭 무 밭도 남아나지 않았다. 이렇게 아마도 1주일은 지내는 듯싶었다. 그러다가 한 마을의 큰집에 들어서니 부엌에는 흰쌀밥과 쇠고기국이 한솥 끓여져 식은채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퇴각하는 인민군이 포식을 하려다 다급히 도망친듯 싶었다. 어디쯤인지 짐작도 할 수없는 산속 깊숙히 길 없는 길을 더듬어 도주해가다가 저녁무렵에 어느 산마루에 올랐다. 거기가 철원과 금화 중간지점쯤 되는 것같았다. 저만치 멀리 수 십대의 트럭이 아직 어둡지 않은데 헤드라이트를 켜고 도로를 일로 북상하고 있었다. 희옷 입은 주민들이 나와 만세를 부르며 국군의 북진행렬을 환영하는 모습도 보였다. 내 짐작에 국군이 벌써 철원을 거쳐 금화 이북까지 진격해온 것으로 알았다. 의용군 지휘부에서도 그렇게 판단하고 대열은 이미 국군에 포위된 것으로 보고 포위망을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는 눈치였다. 분대장 소대장까지 소집을 하드니 한참만에 돌아와 출발을 재촉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북쪽을 향해 산을 내려와 그 도로망을 가로질러 산으로 도망치는 작전이었다. 산 밑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가을철이라 물이 깊지는 않았지만 야음을 틈타 가슴까지 차는 물길을 헤쳐 포위망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아~ 이 포위망 탈출작전이 내게 운명의 갈림길이 될 줄이야..... 어떻든 나도 대열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따라붙었지만 강을 건너 도로를 가로질러 마을 뒤 산속으로 들어가는 도중 길이 헷갈려 앞줄을 놓지고 말았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 바로 내 앞을 가던 안경재비 분대장의 실수였다. 그는 밤눈이 어두웠다.도망가는 마당에 앞의 대열은 뒤돌아볼 겨를이 없다. 밤길 앞이 안보이면 낙오될 수밖에 더 있겠나. 그것이 내게 기회를 줄룰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어떻든 후속 대열의 맨 앞장에 섰던 분대장은 그나마 또 어디론가 이탈되고 결국 내가 맨 앞 선두를 서게되었다. 뒤따르던 중대장의 인솔로 먼저 간 대열을 찾아 합류하고자 했으나 칠흑 속 종적을 찾을길이 없어 산속을 더듬어 그대로 북행퇴각을 하고 있었다. 낙오된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짐작으로 밤 두 세시경이었으리라. 대열의 낙오된 인원이 줄잡아 2 3백 명 쯤 되는 것으로 본다. 한시간 행군 5분휴식은 퇴각 패잔병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가는 도중 진짜 인민군 패잔병 부대를 만났다. 연대병력쯤 되는가 싶었다. 연대장인 듯 싶은 왕별 군관이 우리 낙오대열을 자기부대와 합류시키고 자기 지휘 하에 넣었다. 그 왕별이 우리 낙오병에게 연유를 따지는 것이었다. 이구동성으로 맨 앞장섰던 나를 가리키며 저 동무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왕별이 나를 끌어내더니 심문을 했다. 동무 때문에 낙오된데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서 내 신상에 대해 물었다. 고향은 서울이고 학생신분이며 공화국에 충성 바치고자 의용군에 입대했다고 대답했다. 왕별은 "이 간나새키 거짓말 하는 구만. 남반부 간나새키 괴로군이 여기까지 온 줄 알고 도망가려고 했지"하며 으름짱을 놓았다. 그리고는 동무는 인민의 이름으로 벌을 받아야한다면서 너 같은 새키 우리 공화국에 필요 없으니 저리 열 발자국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말투가 거친 함경도 사나이였다. 나는 직감했다. "모진 목숨 여기서 끝이구나." 걸어 가다가 돌아서며 왕별에게 호소했다. "조선인민공화국과 김일성장군께 충성을 바치고자 학생신분으로 의용군을 지원해서 왔습니다. 나는 결코 반동분자가 아닙니다. 죽어도 공화국 품에 안기겠습니다"고 생가지도 못했던 열변을 토했더니 꺼내 들었던 권총을 거두면서 "이리 와" 하잖는가. 의용군 끌려와서 두 번 째 목숨 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두 목숨 사는 아이가 되었다. 북상 패주행군은 계속되었다. 아마 새벽 다섯 시 경일까? 5분 휴식 때 바로 뒤에 따라오던 내 단짝 서울 숭문중학생 이(이름은 잊었음)군과 속삭였다. "우리 결판내자. 여기 동솔폭이에 엎드려 잠든 척 하다가 기회를 보자"고....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출발소리와 함께 모두들 떠나고 난지 십 여분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사위가 조용했다. 다행히 발각되지 않고 뒤에 쳐지게 된 것이다. 이제 행동은 우리의 자유였다. 그뿐인가? 이미 국군이 이 지역 일대에 진주했을 테니 마을을 찾아 산을 내려가 살길을 찾자고 했다. 둘이서 방향 없이 산을 내려가고 계곡을 건너고 또 산을 돌고 돌아 발길을 재촉해 닿은 고시 강원도 평강군 어느 마을이었다. 두 시간은 더 헤매 가을날 아침 찾은 산골 마을, 집이 대여섯 채 있었다. 구 중 큰집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렸다. 한 노파가 나와 문을 열고 누구시냐다. 우리 인민군인데 이제 날이 밝아 비행기 공습 때문에 더 못가니 여기서 낮에 좀 쉬고 가겠다고 아예 못 박아 말을 하니까 그러라면서 어서 들어오란다. 두 녀석이 사랑방에 들어가 한 순을 돌리고는 또 욕심이 생겨 할머니를 불러서 이집 내력을 묻고 밥을 부탁 했다. 조밥에 열무김치와 장아찌를 성찬으로 알고 실로 며칠만인지 모를 밥맛이 꿀보다 달았다. 밥 먹어본지가 열흘은 되었을 것이다. 거기다 고구마까지 쩌 주는 데는 뭐라 고마움을 표해야할 길이 없었다. 저녁녘에 이집 아들이 돌아왔다, 마을 민청단장이라며 자기소개를 했지만 국군이 일대에 진주했고 인민군은 모두 패주해서 이제 완전히 대한민국이 되었다며 서울 학생인 우리들을 동정을 했다. 배고플 때 먹으라며 고구마를 쩌 주며 안전한 귀향길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둘은 다음날 일찍 노파와 청년에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길을 더나 철원을 거쳐 대광리 전곡행 신작로 길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지나가는 국군 후생사업트럭을 손들어 세워 올라타고 한차 가득 실은 북어를 뜯어먹으며 검문소 직전 미아리까지 와서 내려 그 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시내로 들어서니 천지가 폐허인 채 동족상잔의 뼈아픈 상처를 들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괴뢰로부터의 서울 귀환 탈출극은 막을 내렸다. 1950년 10월 17일 화요일이었다. 한 가지 부연할 말은 그나마 두 달간 고통 속에서도 무병으로 버텼고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니 이가 과장해 한 되는 되었다. 이제 노을도 지고 한 밤중 어둠 속, 한 인생의 막장을 보면서 빈말이나마 소년시절 한때 목숨 부지코저 조선인민공화국과 김일성 장군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인민군 왕별한테 호소했던 과거를 참회함으로써 무거운 자책의 짐을 벗고 3막 일장 단막극의 막을 내립니다. 늦은 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0. 6. 21. 0시 5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