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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의 38선 萬世橋를 거꾸로 건너며 수용소내서는 훈련도 없이 거의 매일 미군 공습을 피하고 교실에서 인민군가나 부르며 지내기를 3주 여... 9월 24일 일요일 밤 포성을 지근에서 들으며 수용원 전원을 운동장에 집합 시키드니 사복을 벗겨 도토리물 드린 군복 비슷한 것으로 갈아입히고 야간 행군이 시작되었다. 3주 만에 보는 거리 밤풍경은 불빛 한 점 없이 길목마다 시가전 대비 참호와 모래가마니로 쌓아올린 토치카로 메워져 있었다. 행선지도 모른 채 끌려간 곳은 혜화동의 보성중학교였다. 무슨 일인지 거기에 수용을 하지 않고 되돌아 나와 다시 야간행군이 계속되었다. 거의 1개연대규모가 사행하며 닿은 곳이 안암동의 고려대학교였다. 거기서는 남동쪽 아마 태능 쯤으로 짐작되는 곳으로부터 격렬한 총격 소리까지 들려 왔다. 거기에 수용된 지 이틀이 지나는 9월 26일 즉 그해 8월 추석날이었다. 새벽에 기상하여 아침밥 먹으러 식당에 갔다가 별안간 귀를 찢는 고함소리에 모두들 밖으로 나와 다시 대열을 지어 안암동 뒷산으로 줄다름 쳤다. 먹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흰쌀밥과 쇠고기국이 그대로 다 식어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다급한 전황이었던 것같다. 다음 다음 날 9월 28일 서울은 수복되고 인민군 패잔병들은 숟가락을 든 채 북으로 북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진짜 고행길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안암동 뒷산을 넘어 미아리 다리께로 내려와 도로를 따라 패주행진을 계속했다. 행군도중 길가에 나뒹구른 인민군 T34탱크를 대 여섯 대 목격했다. 추석날 아침밥도 거른 채 쫓겨 간곳이 도봉산 밑 의정부 호원동에 자리 잡은 인민군 衛戍司令부였다. 포성이 일단 잠잠해졌지만 부상병이 수도 없이 후송되는 꼴을 보고 실제 전쟁의 참상을 목도했다. 천막에 수용된 서울의 의용군은 거기서 비로소 내 키 만큼이나 기다란 소제 아시보총을 지급받고 총기 다루는 교육을 며칠 받다가 다시 후퇴를 거듭, 포천을 거쳐 철원 평강으로의 도주행각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 후퇴현장에서 미군기의 정확한 정찰정보력을 실감했다. 주로 야음도주지만 다급할 때는 백주에도 그 긴 대열을 노출시킨 채 산길 들길을 가리지 않고 북향도주를 재촉했다. 이때 반드시 미군 정찰기가 상공에 나타나 몇 바퀴 선회하고 살아지면 몇 분후 어김없이 쌕쌕이라는 제트기 두 세대가 뒤로부터 소리 없이 나타나 패잔군을 도륙해댔다. 우리를 죽일려고 제트기 두 세대가 번갈아 소리 없이 저공비행하며 기관포탄과 로켓탄을 쏘아대고는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내게는 희망이오 천사의 날개로 비쳤다. 아마 이 내 심리를 누가 알았다면 나는 몇 번이고 총살을 당했으리라. 공습으로 죽어나간 대열 속의 의용군은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그때 짐작컨데 여러 차례 공습으로 2 3백 명은 죽지 않았나 싶다. 시체는 그대로 버리고 걷지 못하는 부상자는 중대장이 아예 안락사 해버리고 성한 놈들만 끌고 간다. 이것이 인민군의 패주모습이었다. 후퇴 중에도 여기저기서 길가에 세운 채 모두가 보는 가운데 총살당하는 의용군들도 많았다. 병약하거나 명령 위반이거나 아니면 사상불순이거나 도주시도자이거나 이런 자들은 불문곡직하고 배속된 현역인민군 중대장이 즉석에서 총살해버리는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춰 전쟁에서 패주행각만큼 비참상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포천을 지나 지포리로 향하던 야간 도주시 5분 휴식 중 깜박 잠이 들어 출발신호에만 신경 썼던 나머지 베고 잠들었던 아시보총을 그대로 놓고 대열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남들의 총을 보고 아뿔싸 했다. 내 바로 앞에 가던 분대장에게 사정을 보고하고 역주행해서 짐작되는 지점을 한참 더듬어 만져지는 것을 들어 올리니 바로 내 총이었다. 분실했으면 영낙없는 총살감이었다. 의용군에 끌려와서 나는 이렇게 첫 번 째 죽을 고비를 넘겼다. 북으로 북으로 향하던 10월 어느 날 밤 우리는 마침내 원한의 38선을 넘었다. 만세교리라했다. 와중에도 그날 밤 고향 이남을 등지는 월경기념이라며 동료어른들은 주머니를 털어 돼지나 닭을 잡고 막걸리를 나주자며 법석을 떨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내 분대장은 30대 초반의 안경을 낀 키가 자그마한 남노당원으로 서대문형무소 출소자였다. 무슨 일인지 내가 가장 어리기도 했지만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줘서였는 지 나를 친동생같이 대해 주었다. 38선 만세교를 건너며 그때 느낀 감상이야말로 나로서는 형언할 수없이 착잡했다. 내가 지옥의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삶의 희망을 품고 찾아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상이 변해 그 길을 되레 역행하고 있는 이 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도무지 내게는 대안이 안 섰다. 고향 잃고 가족 잃고 친구 잃고 나라마저 잃은 이 소년이 어디메 간다는 것이냐. 탈출해 나온 지옥으로 다시 끌려가는 신세가 한 없이 서러웠다. 이제 조금 더가면 철원이란다. 그런데 전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갈수록 깊은 산 산만 나타났다. 서울을 등진지 벌써 두 주가 지나고 있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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