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져서, 저가 알기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했음을 말씀드립니다.
= 제 16 부 =
구국적 8,3 긴급 조치와 혁명적 박정희 결단
전무후무[前無後無] 한 것으로 힘든 일이지만, 반드시 할 수 있다고 다짐하였다. 문제는 비밀을 유지되어야 하며, 이를 누설되면 만사가 허사가 됨으로 기밀 보완이 절대적이라고 하였다. 대통령은 결단을 내리고 가장 신임하는 김 용환 장관이 모든 책임을 지고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통령은 헌법상 대통령 비상긴급조치권에 의거, 경제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을 선포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8 . 3조치이다. 구국적[救國的] 결단[決斷]이다. 혁명가만이 할 수 있는 영단[英斷]이다. 8 . 3 긴급명령은
자유기업경제 체제하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렵고, 경제사적으로 보아도 전무후무한 사채동결 조치이다. 우리는 여기서 96 년도 외환위기로 국가부도를 낸 비극을 상기할 때 그때 박대통령이 대통령으로, 그리고 김 용완 전경련 회장과 김 정렴 실장 같은 세분이 계셨다면, 국가부도의 외환위기를 당연히 막을 수 있었다고 단언 할 수 있다. 그렇다! 만약에 예방할 수 있었다면, 신용불량자 500 만도 없었을 것이고 임시직, 계약직, 실업사태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노숙자도 없었을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그 과정이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겠는가? 아는 것이라고는 민주 두 글자만이 전부로 알고 떠들었고, 백성들은 덩달아 민주 춤에 춤만 추었던 것이다. 그때 8 . 3 조치의 영단을 내린 사람이 없었던 것이 비극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8 . 3 긴급조치 당시에 한국경제의 위기상황은 96 년도 외환위기 상황은 간단한 사전 조치만 취했어도, 민족적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채 동결은 혁명가의 제 2 의 0時 이었다. 1997 년 국가 부도 시[國家不渡時]에는 당시 전경련회장인 S K 의 최종현 회장인데, 산소 호흡기를 들고
대통령과 담판하다. 그는 폐암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산소 호흡기[酸素呼吸機]를 들고 국가적 긴급 위기 상황을 호소하고 비상조치를 호소하였으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대통령을 뽑은 국민들이 원망하였을 것이다. 결국은 백성들만 불상하겠구나 하면서,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을 것이다. 신고액[申告額]을 3 년 거치 5 년 분할[分割] 상환 이자 율, 월 1 . 35% 로 하고 채권자가 원하면 출자 전환도 할 수 있게 하였다. 8 . 3 사채동결로 효과는 예상을 넘어 수출이 급속히 증가하고 제조업이 30.8% 증가하였고,
국내 투자 16.2% 증가. 국내 총 생산량 전년도 대비 19% 증가. 성장 6.4% 이다. 전경련 김 용완 회장은 경제단체장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 영단으로 경제난국을 타파 극복하고, 다시 고도성장을 하게 된 것은 대통령의 적절한 8 . 3조치의 결과라고 칭송하였다. 참으로 칭송을 듣는 사람도 칭송을 하는 사람도 너무나 흐뭇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김 용완 전경련 회장은 진심으로 감동했을 것이다. 김 회장은 당시 박대통령이 참으로 위대한 영도력을 가지신 대통령으로서 감사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당시 국가적 위기임을 호소하고 통치자는 즉각 알아차리고, 오후 스케줄을 취소하고 당면 위기상황 해결책을 모색한 것은 참으로 위대한 조치였던 것이다. 김 용완 회장 참으로 주목할 것은 김 용완 회장의 처신이다. 자기 기업인 경성방직을 확장하기 위하여 매입한 공장 부지를 매각하여 모든 사채를 정리하였다. 자기의 호소가 사심[私心]이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결국은 정부예산을 반으로 축소하라고 하는 폭탄선언[爆彈宣言]을 하기 위한 준비로, 당시 시설이 퍼런 혁명정부 하에서 대통령에게 정부예산을 반으로
축소하라고 호소할 때는 모든 위험을 각오하고, 부처님에게 목욕 재배하는 심정으로 하였을 것이다. 김 용완 회장은 현대 국가의 충신[忠臣]이고, 충신의 충언[忠言]을 받아들인 영도자의 결단은 민족의 홍복인 것이다. 만약에 대통령이 알았다고 하고 그냥 넘어갔다면, 5 . 16 혁명은 무효화되었을 것이고, 나라는 결단 났을 것이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 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의료보험제도 1963 년 12 월에 입법, 임의 가입 실시 1965 년에 나주 호남비료공장에 의료보험조합[醫療保險組合]을
발족[發足] 1977 년에 강제성 조합 강행, 신 현학 장관이 강력히 실행. 210 만 명 가입 의료보험은 1881 년 독일의 비스마르크 수상 1883 년 실시, 안보의 긴박성과 산업정책 닉슨 독트린 미 7 사단 철수, 1968 년 청와대 습격 1 월 23 일 미 푸에블로호 납치, 박대통령 일면 건설. 일면 국방정책. 울산 삼척 공비 침투 1969 년 박대통령 닉슨 공동 담화 발표 6 월 22 일 동작동 국립묘지 폭파 사건, 휴전 18 년 만에 155 마일 방위업무 전담, 방위 산업 시동, 1968 년 250 만 예비군 무정사키다. 박대통령은 M 16 소총
제작을 독려하면서 한국과학기술원(KIST) 창설, 한 미 간에 미군 2 만 감축 보상으로 15 억 달러 국군현대화 합의 오 원철 여하한 무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 모든 화기는 적격소재, 정밀가공, 부품 결합[部品 結合]하면, 무기[武器]가 만들어진다. 오원철 보고, 즉시 청와대 근무 1971 년 11 월 10 일 오 원철은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 관장한다. 1972 년 신년사에서 북한의 남침준비 완료하고 기습공격을 노리고 있다. 북한의 도발을 일격에 분쇄할 수 있는 방위태세 완비 우리 손으로 국군 현대화 방위산업 육성을 강조
1973 년 중화학공업 선언 중화학공업[重化學工業]은 방위산업[防衛産業]이다. 방위산업도 수출산업으로 육성한다. 1. 제 2 제철 광양만 2. 제 2 종합화학기지 여수, 광양. 3. 비철금속 온산 4. 종합기계 공업단지 창원. 5. 조선기지 거제 6. 전자기지 구미 7. 수출경공업단지 군산. 안 경모 산업기지 개발공사 사장으로 활약, 대덕연구 단지. 해양연구단지. 표준연구소. 핵연료개발공단. 기계금속시험연구. 전자기술연구소. 전문대학 설립. 한국기술검정공단 발족에 이락선 임명. 북한 땅굴 1974 년 11 월 15 일 7 시 35 분
정찰대 땅굴 발견 1 시간에 7,200명 침투 할 수 있는 통과 규모. 1975 년 3 월 20 일 중부전선에서 제 2 의 땅굴 발견. 10 일 후에 1975 년 3 월 30 일. 월남 다낭 퀴논 함락, 캄보디아 수상 망명, 월남 대통령 티우 사임. 4 월 23 일. 미 포드 대통령 월남전 종결 선언, 4 월 29 일 박대통령 서울 사수 선언[死守 宣言] 긴급조치 선포. 난국 극복 호소. 북한 노동당 30 주년을 기념식에 10 월 10 일 남침개시일로 정하고, 한국은 소련과 중국, 월남, 캄보디아로 포위되고 있었다. 방위세[防衛稅] 신설, 1976 년 8 월 18 일
판문점에서 북괴 군사들이 미군들 죽여라! 도끼로 살인 만행을 저질렀다. 박대통령의 분노 극에 달하다. 한미 양군은 데프콘 2 전쟁돌입상태 선언하고, 한국군 선두에 서고 지상군 해병군[海空軍]의 완벽한 작전으로 미루나무 초소를 철거, 만약에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까지 진격하는 작전으로, 북괴의 저항 없이 완벽한 작전으로 종결. 박대통령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방위산업 육성 결정, 행정수도 건설. 1970 년 552 만 1978 년 천만 육박 예상 수도권개발 제한지구, 그린벨트 1971 년 선포. 박대통령은 항상 사색(思索)하고
창조[創造]하는 대통령[大統領]이다. 대통령은 자기 조국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데 만족했다. 대통령은 정신문화원을 걸립. 10 월 27 일 새벽 6 시 박대통령 사망. NHK 보도. 임진란을 예상하고, 10 만 양병론[養兵論]을 주장한 율곡 선생의 주장을 실천한 지도자. 당시 이율곡 10 만 양병 론을 실천했다면, 30 년 후에 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다. 북한은 남침하여 동족을 300 만이나 살상했으며,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다. 박 대통령은 남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 분이다. 참모들의 분야별 의견을 존중한다. = 다음에 계속 됩니다. =
-- 안동 촌노 --